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황태성 사건 (문단 편집) == 황태성은 누구인가 == || [[파일:황태성 1928년.jpg|width=400]] || [[파일:황태성 1930년.jpg|width=270]] || || 1928년에 찍은 사진 || 1930년에 찍은 사진[* 이 사진에는 그의 이름이 황대용(黃大用)으로 되어 있는데, 그것은 그의 이명(異明이었다.] || 황태성(黃太成)은 [[1906년]] [[경상북도]] [[상주시]]에서 태어났다. 그는 경성제일고등보통학교에 들어갔으나 교내의 일본인 교장에 반대하는 동맹휴학에 참여하는 바람에 [[퇴학]]당했고 [[연세대학교]]의 전신인 연희전문학교에 들어갔지만 그곳에서도 퇴학을 당했다. 그는 어릴 적부터 [[반일]] 감정을 가지고 있었으며 [[좌익]] 사상에 관심이 많았다. 이 때문에 그는 이후 [[조선공산당]]에 들어가 [[공산주의]] 운동을 하면서 투옥과 석방을 밥 먹듯이 했다. 또 그는 어릴 적부터 [[죽마고우]]였던 [[박상희#s-1]]와 항일독립운동을 함께 했다. 그러면서 박상희의 동생인 [[박정희]]와도 자연스레 인연을 맺게 되었다. 박정희는 '형님' 거리며 유독 그를 잘 따랐고 황태성은 박정희에게 친한 형으로서 조언과 꾸중을 해주었다. [[8.15 광복]]을 앞두고 황태성은 [[여운형]]의 [[조선건국동맹]]에 들어가 [[전라도]] 지방의 책임자로 활동했다. 광복을 맞이하면서 그는 [[조선공산당]] 당원으로 활동하였다. 공산주의 활동 중에도 [[박정희]]와 [[박상희]]를 계속 만났고 [[박상희]]에게 중매를 서 주기도 했다.[* 나중에 박상희 밑에서 태어난 딸 박영옥이 [[김종필]]과 결혼을 했다.] 황태성은 1946년에는 [[대구 10.1 사건]]에 박상희와 함께 뛰어들었으나 박상희는 경찰에 의해 사살당했다. 결국 황태성은 [[박정희]]의 [[남조선로동당]] 입당 때 신원보증을 해 준 후 [[월북]]했고 [[북한]]에서 차관급인 무역성 부상까지 맡는 등 고위 간부가 되었다. 하지만 1950년대 [[남조선로동당]] 출신에 대한 대규모 숙청으로 인해 남한에서 [[5.16 군사정변]]이 터질 당시에는 권력에서는 밀려난 상태였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